《첫눈이 사라졌다》(First Snow, 2021)는 일본과 프랑스가 공동 제작한 감성 드라마로, 잊혀 가는 기억과 지나온 관계, 인간의 내면에 자리한 후회와 용서에 대해 조용히 성찰하는 영화입니다. 거창한 서사나 화려한 연출 없이도, 이 영화는 조용한 강처럼 관객의 마음 깊은 곳에 잔잔한 울림을 남깁니다. 노화, 회한, 그리고 말하지 못했던 감정들이 눈처럼 내려 쌓이며, 우리는 한 인간의 회상을 따라 함께 걸어가게 됩니다.
주인공 하루오(하라다 료)는 기억이 점점 흐릿해지는 전직 사진작가입니다. 외로움에 익숙해진 그는 어느 날,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됩니다. 발신인은 히로미, 40년 전 그가 떠났던 고향 마을에 남겨 두고 온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녀의 마지막 편지를 계기로, 하루오는 마음속에 덮어둔 수많은 감정의 조각을 다시 꺼내기 시작합니다. 이 글에서는 ‘시간’, ‘관계’, ‘기억’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영화의 메시지를 풀어보려 합니다.
1. 시간과 기억 – 사라지는 것들과 남는 감정
‘시간’은 이 영화의 가장 중심적인 장치입니다. 하루오는 현재의 삶에서 무언가가 계속 사라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사람의 얼굴, 이름, 장소, 사진 속 피사체까지도 흐릿해져 갑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속 깊은 곳에 남은 감정들은 오히려 점점 또렷해집니다.
영화는 하루오가 고향 마을로 돌아가는 여정을 통해, 그가 간직한 기억과 잊어버린 기억의 경계를 넘나듭니다. 어릴 적 친구들과 놀던 언덕, 사진관 골목, 눈 내리던 밤의 풍경—이 모든 것은 현실 속에서는 낡고 변했지만, 그의 기억 속에서는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카메라는 이를 매우 섬세하게 따라가며, 관객 또한 그의 기억을 공유하게 만듭니다.
기억이 사라진다고 해서 감정도 사라질까요? 영화는 이 질문에 ‘아니다’라고 답합니다. 기억은 왜곡되거나 잊히더라도, 그 당시 느꼈던 감정만은 그대로 남는다는 것이 영화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하루오가 사진을 바라보며 “이 사람은 누구였더라…”라고 혼잣말을 하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그 사람을 향한 따뜻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처럼 영화는 감정의 기억이 지닌 지속성과 순수성을 섬세하게 조명합니다.
2. 관계의 무게 – 말하지 못한 사랑, 남겨진 마음
《첫눈이 사라졌다》는 단지 과거를 회상하는 영화가 아닙니다. 이 영화는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하루오와 히로미는 젊은 시절 서로를 사랑했지만, 사회적 현실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인해 결국 헤어지게 됩니다. 영화는 그 이별에 대해 명확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설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오래 남아 있는 감정이 있습니다.
히로미의 마지막 편지는 단 한 페이지 분량입니다. 하지만 그 짧은 글 속에는 수십 년의 시간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그때 말하지 못했던 말들이 아직도 내 마음에 남아 있어요. 당신이 내 첫눈이었어요.” 이 대사는 단순하지만,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감정의 결입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많은 관계를 경험하지만, 모두를 정리하고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말하지 못한 마음은 그저 시간 속에 묻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마음속 어딘가에서 더욱 선명해집니다. 영화는 바로 그 지점을 포착합니다. 하루오가 히로미의 남긴 옛 손수건을 가슴에 품고, 그녀의 낡은 음성을 듣는 장면은 슬픔과 평온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명장면입니다.
관계는 끝났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지 못했던 마음은, 때로는 말보다 더 강하게 남는다는 것. 영화는 그런 감정을, 침묵 속의 진심으로 전해 줍니다.
3. 존재와 선택 – 우리가 선택하지 못한 기억들
인생은 수많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첫눈이 사라졌다》는 ‘선택하지 못한 것들’에 주목합니다. 하루오는 인생의 중요한 시점마다 자신이 어떤 결정을 했는지조차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선택의 결과는 그의 삶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놓친 사람, 말하지 못했던 마음, 돌아보지 않았던 장소들을 따라가며 ‘존재의 흔적’을 다시 되새깁니다.
이 영화에서 존재는 기억이나 현재의 자각만으로 정의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떤 마음이 남아 있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하루오가 과거의 장소들을 걸으며 눈을 감고 머무는 순간, 그는 과거의 자신을 다시 만납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잊고 살았는지를 서서히 알아가며, 삶의 본질에 한 걸음 더 다가서게 됩니다.
기억은 선택의 결과만 남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선택하지 못한 순간들, 말하지 못했던 마음들, 지나쳤던 사람들—all of these shape who we are. 《첫눈이 사라졌다》는 바로 이 ‘놓쳐버린 것들’이야말로 인생의 진짜 무게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마무리하며 – 첫눈처럼 사라져도 남는 것들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하루오가 히로미와 함께 눈을 맞던 골목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장면으로 마무리됩니다. 하늘에는 조용히 첫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그는 말없이 눈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한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기억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감정도 흐릿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감정은, 첫눈처럼 우리 마음에 고요하게 쌓이고, 끝내 녹지 않습니다.
《첫눈이 사라졌다》는 관객에게 묻습니다:
기억은 왜 그토록 잊히기 쉬운가요?
사랑이란, 표현하지 않아도 존재하는 걸까요?
우리가 놓친 것들은 정말 사라진 걸까요, 아니면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는 걸까요?
이 영화는 정답을 주지 않습니다. 그 대신, 조용히 질문을 던지고, 감정을 되새기게 합니다. 그리고 관객 스스로가 자신의 기억과 감정 속에서 그 답을 찾게 만듭니다.
첫눈처럼 사라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중에는, 시간이 지나도 마음속에 남아 결코 사라지지 않는 감정도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속삭이고 있습니다. 오늘 당신의 마음속에 조용히 내려앉는 첫눈은 무엇인가요?
카테고리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