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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블랙 맨 인 샌프란시스코》 - 도시와 기억의 서사시

by 항상행복한부자 2025. 3. 27.

《The Last Black Man in San Francisco》(2019)는 격변하는 도시와 그 안에 살아가는 개인의 감정을 정교하게 엮은 시적인 독립영화입니다. 조 탈벗 감독의 데뷔작이자 배우 지미 페일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샌프란시스코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공간과 정체성’, ‘기억과 상실’, ‘예술과 연대’를 주제로 깊은 울림을 선사합니다.

공간의 의미: 한 집이 지닌 기억의 무게

지미는 샌프란시스코의 필모어 지역에 위치한 오래된 빅토리아풍 주택을 ‘자신의 집’이라고 믿습니다. 영화의 도입부부터 그는 몰래 그 집을 찾아가 외벽을 정돈하고, 정원을 손질합니다. 그러나 그 집은 이미 다른 사람의 소유이고, 그는 법적으로 그곳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미에게 그 공간은 ‘기억의 성전’이며, 정체성의 뿌리입니다.

이러한 설정은 오늘날 세계 많은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섬세하게 반영합니다. 영화는 사회적 비판보다 개인의 감정에 초점을 맞춰, 뿌리 잃은 이의 시선으로 도시를 바라보게 합니다. 지미의 시선은 관객이 도시를 재해석하게 만들고, ‘공간’이 단지 부동산 가치가 아닌 ‘삶의 기록’ 임을 일깨웁니다.

샌프란시스코는 실리콘밸리의 확장과 함께 미국 내 대표적인 도시 고급화 지역이 되었습니다. 영화는 이 경제적 격변이 삶의 흔적을 어떻게 지워내는지 조용히 보여줍니다. 거리의 낯선 표정, 사라져 가는 벽화, 무표정한 고층건물. 그 속에서 지미는 여전히 자신의 도시를 사랑합니다.

지미는 극 중에서 말합니다. “사람들이 내 도시를 싫어할 권리는 없어.” 이 한 마디는 단지 고집이 아닙니다. 이는 ‘나는 여기서 자랐고, 여전히 이곳에 속해 있다’는 존재의 외침입니다. 지미는 도시에 버림받았지만, 도시는 그의 일부이며, 그가 떠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지미와 친구 몬트는 함께 그 집에 들어가 잠시나마 꿈을 꿉니다. 그러나 현실은 집을 되찾을 수 없다는 냉정한 진실을 안겨줍니다. 이때 영화는 상실을 ‘애도’가 아닌 ‘예술’로 전환합니다.

몬트는 지미의 삶을 바탕으로 대본을 쓰고, 그 집에서 즉흥 연극을 펼칩니다. 이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상실의 기억을 기록하고 남기는 작업입니다. 잃어버린 공간을 다시는 가질 수 없어도, 그것을 ‘말’과 ‘행동’으로 남기는 이 행위는 곧 인간의 기억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힘을 보여줍니다.

침묵과 시선 – 말보다 많은 것

조 탈벗 감독의 연출은 대사보다 풍경, 표정, 시간에 주목합니다. 롱테이크로 촬영된 자전거 씬, 샌프란시스코 항구를 배경으로 서 있는 지미의 뒷모습, 극 중 인물들이 말없이 앉아 있는 장면들은 모두 시처럼 감정을 전합니다.

이 영화의 미학은 말의 절제 속에서 터지는 감정의 여운입니다. 몬트의 연기, 지미의 정적, 도시의 풍경이 겹쳐지며, 관객은 설명 없이도 감정을 따라가게 됩니다. 이는 마치 일본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작품들과 닮아 있으며, 감정을 정면으로 표현하기보다 남겨두는 방식으로 더 깊은 울림을 줍니다.

지미와 몬트의 관계는 형제, 동반자, 협업자의 모습을 모두 지니고 있습니다. 몬트는 지미가 무너질 때 가장 가까이 있는 존재이고, 지미는 몬트의 예술적 시선을 인정하고 존중합니다. 둘은 서로가 없으면 존재를 유지할 수 없는, 감정적 공생관계에 가깝습니다.

영화는 이 우정을 거창하게 다루지 않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영화 전체를 지탱하는 심장과도 같습니다. 마지막에 지미가 떠나는 장면에서 몬트가 보여주는 침묵은, 수많은 대사보다 큰 슬픔과 이해를 담고 있습니다.

지미는 집에 대한 자신의 기억을 진실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극 후반, 그의 아버지는 그 집을 지은 적도 없고, 그들이 실제로 거기 산 적도 없다고 말합니다. 지미의 기억은 사실이 아니었던 걸까요?

영화는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기억이 거짓이라면, 감정은 사라지게 되는가?” 지미의 기억은 진실일 수도 있고, 허상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에게 집이라는 공간을 의미 있게 만든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영화는 현실보다 더 중요한 건 자신이 믿고 지켜낸 감정임을 말합니다.

결말 – 도시를 떠난다는 것의 의미

지미는 결국 도시를 떠납니다. 그는 더 이상 그 집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떠나는 것은 도피가 아니라, 상실을 수용한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는 자신이 소중히 여긴 기억을 가슴에 품고, 그 집을 지나 도시를 바라본 채로 노를 젓습니다. 고통스러운 이별이 아니라, 조용한 작별 인사입니다.

《라스트 블랙 맨 인 샌프란시스코》는 젠트리피케이션, 도시 상실, 이주민 문제 등 사회적 주제를 담고 있지만, 그것을 대놓고 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술과 기억을 통해 상실을 언어화하고, 감정을 조용히 기록합니다.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슬픔을 말할 줄 아는 정직한 태도’입니다. 우리가 지키려 했던 것들, 떠나보낸 것들, 그리고 여전히 우리를 이루고 있는 것들에 대해, 영화는 스스로 묻고 또 관객에게 묻게 만듭니다.

이 영화는 마치 오래된 일기장 같은 작품입니다. 대단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지만, 장면 하나하나가 기억처럼 남습니다. 《라스트 블랙 맨 인 샌프란시스코》는 말합니다. “당신의 도시, 당신의 기억은 여전히 그 안에 살고 있다”라고.

집을 잃는 건 공간을 잃는 것이지만, 존재를 잃는 것은 아닙니다. 이 영화를 감상한 당신이라면, 그 조용한 응시 속에서 자신의 과거와 기억도 다시 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집’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진짜든, 기억 속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