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헤어질 결심 - 사랑인가, 죄의 공모인가

by 항상행복한부자 2025. 3. 28.

헤어질 결심

 

 

《헤어질 결심 (2022)》은 박찬욱 감독이 오랜만에 선보인 로맨스 스릴러이자, 심리 멜로의 정점을 보여준 작품입니다. 형사 해준과 용의자 서래 사이의 복잡한 감정선은 단순한 사랑도, 명확한 범죄도 아닌 그 사이의 영역에서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이 영화는 사랑과 도덕, 의무와 욕망 사이의 균열을 섬세하게 포착하며, 인물들의 눈빛과 대사, 침묵 속에 거대한 서사를 담아냅니다. 이번 리뷰에서는 《헤어질 결심》의 인물 심리와 상징, 연출 방식 등을 중심으로 깊이 있게 해석해 보겠습니다.

1. 사랑과 추적, 형사와 용의자 사이

영화의 줄기는 간단합니다. 산에서 추락사한 한 남자의 사건을 수사하게 된 형사 해준은, 피해자의 아내인 서래를 조사하면서 점점 그녀에게 이끌리게 됩니다. 문제는 그녀가 유력한 용의자라는 점, 그리고 해준이 경찰로서 그녀를 의심하면서도 사랑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해준은 철저한 원칙주의자이자 도덕성을 중시하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서래와의 만남 이후 그의 세계는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감시는 곧 애착으로, 의심은 곧 연민으로 바뀌고, 그는 점점 자신도 모르게 서래에게 끌려 들어갑니다. 사랑이 추적이 되고, 추적이 사랑이 되는 지점에서 영화는 관객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이것은 사랑인가, 죄의 공모인가?

서래 역시 단순한 femme fatale이 아닙니다. 그녀는 고전적인 유혹자가 아니라, 모호하고 불안정한 경계에 선 인물입니다. 그녀는 해준의 윤리적 갈등을 조장하면서도, 자신 역시 감정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이 둘의 관계는 명확히 정의할 수 없기에 더욱 깊은 긴장감을 유지합니다.

2. 산과 바다, 시와 사진 - 상징이 말하는 감정

《헤어질 결심》은 상징의 영화입니다. 인물의 대사보다 배경, 소품, 프레임 구성에서 더 많은 의미가 전달됩니다. 가장 핵심적인 상징은 바로 ‘산과 바다’입니다. 산은 죽음의 시작이자 수사의 출발점이고, 바다는 끝이자 영원한 이별의 장소로 기능합니다. 해준은 산에서 서래를 만났고, 서래는 바다에서 해준을 떠납니다.

이 대비는 두 인물의 감정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산은 위험하고 거칠지만 만남이 이루어진 장소이고, 바다는 부드럽지만 이별의 결단이 내려지는 공간입니다. 사랑의 시작은 치명적인 매혹, 그 끝은 조용한 파국으로 이어지며, 이 모든 과정을 시처럼 구성된 화면이 아름답게 담아냅니다.

특히 박찬욱 감독 특유의 미장센은 ‘응시’를 중요하게 다룹니다. CCTV 화면, 창밖을 바라보는 시선, 스마트폰으로 들여다보는 장면 등은 모두 '관찰'이라는 행위가 얼마나 감정을 증폭시키는지를 보여줍니다. 또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사진’과 ‘녹음’은 기억과 증거, 감정과 진실의 경계를 상징하며, 이 관계가 현실인지 망상인지조차 모호하게 만듭니다.

3. 끝내 이뤄지지 못하는 사랑의 방식

해준과 서래는 서로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은 도덕적, 법적, 사회적 기준을 항상 벗어나 있습니다. 해준은 형사로서 서래를 의심해야 했고, 서래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숨기며 해준의 마음을 확인하려 했습니다. 이 사랑은 진실되었지만, 현실에서 용납될 수 없는 방식이었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결말입니다. 서래는 해준을 다시 만나지만, 그와 완전히 이별하기 위해 스스로 바다에 묻힙니다. 해준이 아무리 찾아도 그녀를 발견할 수 없다는 설정은, 그녀가 영원히 해준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 순간, 비극이 완성됩니다. 이들은 서로를 가장 깊이 이해했지만, 끝내 함께할 수는 없었던 운명입니다.

영화는 이 사랑을 낭만적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대신, 침묵과 거리, 시선과 바람으로 감정을 설명합니다. 해준은 울부짖고, 관객은 말없이 그의 감정에 동화됩니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여운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오래도록 남습니다.

사랑과 죄의 경계, 그 모호함의 미학

《헤어질 결심》은 쉽게 정의할 수 없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로맨스인가? 스릴러인가? 이 작품은 그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모호한 감정의 지점을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박찬욱 감독은 전형적인 이야기 구조를 거부하고, 감정의 미세한 떨림과 상징의 정교함으로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결국 이 영화는 묻고 있습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법과 윤리를 넘어설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끝내 누구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그 질문에 답하는 것은 관객 각자의 몫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이 오래도록 마음을 맴도는 영화, 그것이 바로 《헤어질 결심》입니다.